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쫓기 시작할 때, 우리는 마땅히 더 이른 나이에 하나님을 따르는 법을 배웠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어릴때부터 시작할수록 우리에게는 더 유익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깨닫는다는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통해 가르침을 따르며 귀중한 교훈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우리는 편견으로 가득 차게 되거나 자신의 의견을 지나치게 고집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러한 태도가 우리의 사고방식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
과정을 되돌아볼 때, 이제 ‘멍에’ ( 짐 ) 에 대해 한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멍에 = 훈육, 혹은 성가시고 강제적이며 고통스러운 일.
멍에는무거운 나무로 만든 가로대를 두 마리의 소가 어깨에 서로 연결하여 함께 더욱 효율적으로 밭을 갈 수 있게 해주는 무거운 나무로 된 가로대 를 말합니다. 무거워 함께 걸고 걷고 끌어 한 방향으로 가야하기에 말입니다. 소에게 ( 사람에게 ) 필요한 이 ‘멍에’는 오직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큰 교훈이 됩니다. 제자도의 훈련을 상징하는 비유로도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의 근원이시며 훈련을 통하여 온유와 겸손, 그리고 우리의 짐을 들어주시는 예수님의 귀함을 배우며며, 서로 짐을 지어주고 함께쉼을 얻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는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됩니다.
성경에서 결혼 생활을 멍에로 지칭하는 비유로도 언급되는데, 부부가 ( 남자 와 여자 )믿음으로 결혼생활을 할때 기쁠때나 힘들때나 멍에로 묶일 때 그들은 온전한 하나로 결합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믿지 않는자와 결합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 역시 서로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예로, 믿는자와 안믿는자가 서로 멍에를 같이 할 때 의견충돌과 서로 다른길을 추구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멍에가 고르지 않게 묶인 팀은 마치 멍에를 멘 한쪽이 뒤에 처져 서로를 당기고 아픔으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상태로는 밭 ( 사회 ) (교회 ) ( 가정 ) 을 제대로 갈기는커녕, 그저 작은 원을 그리며 맴돌거나 땅에 구멍만 파놓게 될 뿐이며 서로의 불신이 나오고 불평과 신뢰가 깨지며 목적의 중요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소들에게 멍에을 지우고 시작할때 함께 갈때 가고, 쉴때 함께 쉬며, 농부의 지시대로 배우는 소는 빠르게 힘을 합쳐 일을 마치게 됩니다. 또 경험을 한 엄마소가 아기소에게 가르치는 것을 볼수 있을때 하물며 짐승도 훈계와 순종을 배우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경청하지 않고, 계속 죄와 불순종으로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본문 말씀으로 가벼워 지시기를 바랍니다.
멍에를 메는 일은 결코 유쾌하거나 편안한 경험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하며 인내로 인해 영예로운 일 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의무이며, 짧은 세상의 시간일지라도 우리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을 묵묵히,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본문 멍에를 씌우는 본래의 목적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귀한 교훈입니다. 모든 것이 올바르게 이루어져 두 생각이 다르면 목적의 바른 방향으로 가는것이 불가능 하지만 말씀안에서 믿음으로 멍에를 함께 할때, 서로에게 양보하고 배우고 서로를 보완해 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지나치게 들뜨거나 방종한 행동으로 치우치기 쉽기에 우리의 거칠고 제멋대로인 영혼을 제어하시기 위해 기꺼이 우리에게 멍에를 지우셨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마땅히 걸어야 할 길로 훈련하시고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혹은 징계의 채찍을 통해서든 어떤거든 온 세상 모든 남녀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순종하는 것은 실로 유익한 일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 자신을 돕기 위한, 우리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구약 성경에서 히브리어 단어 ‘멍에’는 혹독한 속박이나 고난, 혹은 종속된 상태를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멍에’라는 단어는 마찬가지로 어디에서 무슨일을 하고 배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에게 쉼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은혜는 다른점 입니다. 억지로가 아니고, 사람에게 보이는게 아니고 , 생명 즉 호흡을 주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겸손과 온유함을 배우는자는 멍에라는 그 단어가 정녕 삶을 더 창대하게 함을 알기에 인내로 참고 기도하며 격려하는자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누구한테 속박과 누가 시킨다고 하는 자칭, 불평과 편견이 없어지며, 내가 하나님을 위해 순종하며, 감사로 그 멍에을 함께 짊어 질때 한량없는 은혜가 넘치며, 감사할 조건이 더 많아지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자가 됩니다.
우리는 과연 누가 우리에게 이 멍에를 지웠는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사탄입니까? 예수님은 율법의 멍에를 주시지 않았고, 여기서 말하는 “멍에”는 율법이나 사람이 지운 멍에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멍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올바르게 배우고 죄 와 멍에에서 자유를 위해서는,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는 하나님의 제약과 훈련이 수반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는 교훈입니다.
마태복음 11장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고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자신에게로 오라고 권하시며, 그 이유는 사랑이신 에수님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종의 온유함으로 우리에게 겸손하게 오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통치는 오직 왕으로서의 권위만을 내세우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우리의 짐을 내려놓고 모든 이들의 짐을 대신 져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짐을 맡낄때 비로소 참된 쉼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바로 우리의 초점은 ‘쉼’에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인으로 사는 것보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쉼을 얻고 내 멍에는 가볐습니다. 또한 인류에게 지워졌던 그 모든 멍에 떨쳐버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야말로 가장 가벼운 것이며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가게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멍에는 곧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을 다할 때 우리는 내면의 평화를 얻게 되고, 더 나아가 삶의 기쁨으로 하늘의 의 와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게 됩니다. 이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내세웠던 율법과 규율, 그리고 형식을 지키는 일처럼 고된 노역이 아니라, 예수님의 한량없는 은혜로 베푸시는 기쁨으로 우리의 영혼이 넘치는 일입니다. 아멘!
사도행전 15장 10절: 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의 조상이나 우리도 감당할 수 없었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걸려고 하느냐?
이방인들에게 모세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할례를 받으라고 요구하는 행위는 두 가지 결과를 알아야 합니다. ( 첫번째)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게 되는 것, (두번째) 제자들의 목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멍에를 지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시기에,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의심하는 것과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의 목에 모세 율법이라는 속박의 멍에를 지우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어리석은 자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 정녕코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알지못하고 믿지 않는 유대인들. 그리고 오신 예수님께서 이세상 오셔서 모든 멍에를 짊어지시고 , 죄인들을 위해 , 구원의 베푸신 예수님, 자격이 없는 자들을 위해 베푸신 은혜의 예수님.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자극하여” 무언가를 행하게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자가 되야하며, 그리고 우리가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으니 자유 안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속박의 멍에에 붙잡히지 말라.” 이는 덫에 걸려 사로잡히는 상황을 가리킬 때 흔히 쓰이는 표현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꾀어내어, 유대교라는 옛 멍에 아래로 다시 끌어들이려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만과 형식과 관례로 하는 어리석은 유대인을 말합니다.
할례는 유대인의 “멍에” 곧 율법이 미치는 영향력에 복종한다는 표징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 문제를 들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시비를 걸었으며, 할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하려 들었습니다. 나의 주장과 오만으로 하나님의 귀한 뜻을 망치는 자 되면 안됩니다.
유대인의 전통 속에서 ‘멍에’라는 이미지는 종종 사람들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는 율법의 역할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더 이상 사람들을 인도하거나 가르치는 역할을 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들을 종으로 전락시키고 맙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율법을 활용하여 도덕적 삶의 지침을 얻거나, 하나님의 백성이 의로운 삶을 살도록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인 성도의 교제에서 교회는 피값으로 치른 아주 거룩하고 성스러운 하나님의 집이기에 교회의 명예를 위하여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음 사역이 아무런 방해 없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성도들은 기독교적 교제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모두 동등한 존재로 여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일을 하든 네 맘에서 우러나고 무슨봉사을 하든 서로의 멍에를 짊어지며 함께 감사하며 겸손과 인내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듯이 서로 순종하는 맘으로 순종의 결실은 하나님께서 잘했다, 수고했다, 칭찬하시며 듣는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은 교회와 기독교적 교제 안에서 ‘멍에’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멍에로 함께 묶여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그리고 기쁠때, 감사할때 함께 나누는 순종을 중심으로 말씀에 서는 리버뷰 교회로 성장합시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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